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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 14세 치우환웅의 역사는 이미 밝혀진지 오래이고 유물 유적으로 확인이 되어 배달국의 역사는 실존임이 증빙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후 70년 동안 저 역사매국노 식민사학하는 넘들은 중국 변방의 악신이라 지랄한다.
니들은 애미 애비도 없는 호로 자식이라는 말이더냐
어찌 조상의 역사를 신화와 조작이라 근거도 없이 망말이라는 말이냐
너희 개만도 못한 넘들 반드시 3대가 하늘의 천벌을 받을 거다...미친 매식자들...
[* "달마동은 원래 치우동이었다"]
"중국기공탐비(中國氣功探秘)" 중에서(66쪽) - 저자 길량신(吉良晨)
因慧可原是跋陀的弟子, 他經常出入少林寺, 也不斷借機向師兄第們講述大乘敎文.因大乘講修佛不像小乘那樣困難, 所以, 僧徒都 着慧可來拜達磨爲師.
跋陀的忠實弟子僧稠, 看到少林寺大勢已去, 已不可久留, 便離開少林寺往林慮山而去, 一些矢志不遺的小乘信徒也都 他上了林慮山.
達磨在五乳峰上9年之後, 少林寺的僧衆已幾乎全部成了大乘門徒.大家也就齊上五乳峰把達磨請進寺內, 達磨從此也就繼跋陀之後, 成爲少林寺的第二代方丈大和尙.
[혜가]는 원래 [발타]의 제자였던 까닭에 항상 소림사에 출입하고 있었으며,
또한 끊임없이 기회가 나는 대로 동문수학하는 사형제들에게 대승불교의 교리를 설하였다.
대승은 불교를 설하고 수행하는 것이 소승과 달리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스님과 신자들이 [혜가]를 따라서 [달마]를 찾아뵙고 스승으로 모셨다.
[발타]의 충실한 제자인 [승조]는 소림사를 보고는 대세가 이미 기울었으며 오래 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소림사를 떠나 임려산을 향하여 떠났는데,
남아있지 않겠다고 뜻을 굳힌 일부 소승신도들도 그를 따라 임려산으로 올라갔다.
달마가 오유봉 위에서 9년을 지내는 동안 소림사의 중생들은 이미 모두 거의 대승문도가 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도 따라서 오유봉으로 올라와 [달마]에게 절 안으로 들어오기를 청하니,
달마는 이로부터 [발타]의 뒤를 잇게 되었으며 소림사의 제2대 방장인 대화상이 되었다.
達磨在蚩尤洞9年, 人們常見他獨自在那里進行壁觀禪定, 于是人們便稱他做"壁觀婆羅門"("婆羅門", 印度四種姓之一, 爲國民之最上級, 掌宗敎之事者).
後來, 人們把達磨用禪定靜心, 消除雜念, 頓悟成佛的學佛方法, 謂之禪學("禪"是靜的意思).隨達磨修煉的人因爲越來越多, 形成了一種佛敎派系, 稱爲"大乘禪宗".
因"大乘禪宗"是從達磨到少林寺以後産生的, 所以人們就稱少林寺爲禪宗祖庭, 稱達磨爲禪宗初祖.
[달마]가 치우동에서 9년을 지내는 동안 사람들은 항상 그가 그 곳에서 혼자서 벽을 보고 선정(禪定)을 행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새로이 그를 "면벽바라문"(바라문은 인도의 네 계급중의 하나로서 가장 높은 계급으로 종교에 관한 일들을 맡아보고 있었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사람들이 선정에 들고 잡념을 제거하며 돈오성불하는,
불교를 배우는 한 방법으로 [달마]를 이용하니 일러 말하기를 선학(선이란 정적이라는 의미이다)이라 한다.
[달마]를 따라서 수련한 사람은 갈수록 많아져서 불교의 한 계파를 이루니 이름하여 "대승선종"이다.
"대승선종"은 [달마]가 소림사에 도착한 이후에 생긴 것이므로 사람들은 소림사를 '선종조정'이라고 하고 [달마]를 '선종초조'라고 부른다.
達磨在蚩尤洞中面壁九年之後, 弟子們把他請進寺來, 又在寺內建起一座達磨亭, 供他面壁潛修. 把蚩尤洞改稱"達磨洞".
在洞下修起一座初祖庵, 也叫面壁庵, 紀念他面壁9年影入石中面功成的事迹.
[달마]가 치우동에서 면벽 9년 한 이후 제자들이 그를 청하여 소림사로 들어오게 하고,
절 안에 '달마정'을 세워 그에게 제공하여 면벽수련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치우동을 "달마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동굴 아래에는 '면벽암'이라고도 부르는 '초조암'이 있는데 [달마]가 '그림자가 돌 속에 들어가도록' 9년 동안 면벽한 것을 기념하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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